겨울 동안 조금은 힘겹게, 그렇지만 읽는 동안 흥미로운 주장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책이 있다. 경제학 입문서로 추천받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는 래디컬한 교수님이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려고 하면서 깔끔하게 쓴 강의 노트 같다. 인기 많은 교양 강의처럼, 막상 수업에 가면 교수님 하시는 말씀에 푹 빠지게 되지만 여느 수업이 그렇듯 수업에 가기까지는 조금 고통스러운..
영어 원제는 Economics: The User’s Guide
이다. 사용 설명서, 라는 말처럼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경제학을 직접 ‘사용’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알지 못한다면, 어떤 이들은 소위 전문가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 따를 것이다. 만약 이들이 소수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우리는 그저 이용될 뿐이다. 하지만 경제학자들의 주장에서 숨겨진 의도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면 훨씬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저자는 설득한다.
책을 읽으면서 서서히, 지금껏 경제학에 대해 갖고 있었던 환상을 냉정한 현실로 벗겨낼 수 있었다.
경제학은 거의 모든 것에 대한 과학이다
경제학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
경제학에 대한 유명한 책들을 훑어보며 몇 번은 들었던 말들이다. 이런 말들이 경제학을 매력적인 학문으로 포장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것이나, 경제학이 결국 초점을 맞춰야 할 근본적인 문제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즉, 경제학에 수학적 공리와 같은 ‘불변의 진리’가 중심이 된다고 생각하는 주류 경제학자들이 지나치게 ‘도취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자신이 삶을 바쳐서 연구해 온 분야, 몸담아 온 분야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지나치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과대망상에 빠지기도 참 쉬운 것 같다. 비단 경제학뿐만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자신의 분야의 경계를 명확히 판단하는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저자의 냉철한 시각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경제학은 무엇으로 규정되어야 하는가
경제학에서 보편적인 방법론이나 이론적 접근법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경제학으로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충동에 휩싸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경제학을 다루는 대상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의견이다. 생산, 생산을 위한 과정, 사람들이 직업을 얻고 수입을 분배하고, 생산물을 재화로 소비하는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관계되는 연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굉장히 당연한 말이지만, 한 가지 원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고 일반화와 확장을 반복하다 보면 이런 전제마저도 간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경제학파 칵테일
이 책에서는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마르크스, 개발주의(아마도 저자의 성향), 오스트리아, 슘페터, 케인스, 제도학파, 행동학파에 이르는 다양한 경제학 학파들의 이론을 골고루 설명하는 데 꽤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지금껏 경제학에 이렇게 다양한 관점이 있는 것은 미처 알지 못했다. ‘칵테일’이라는 표현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의 학파의 시선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학파의 관점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해서 내 성향의 ‘칵테일’을 만들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에서 표현하는 노동은 인간에게 내재한 창의성을 표현할 수 있는 자아 표현의 수단이다. 신고전주의에서는 노동이 소비효용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 이상의 가치는 갖지 않는다. 이런 대립되는 주장 중 어떤 것을 받아들일지는 개인의 몫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어떤 일을 할 독점권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례적인 이윤을 위해, 기업가의 혁신이 이루어지고 이 혁신이 자본주의의 발전에 ‘창조적 파괴의 돌풍’과 같은 큰 영향을 미친다는 슘페터 학파의 주장이 신선했고, 인간의 심리적 요인에 기반해서 불확실성이라는 변수에 큰 무게를 두는 케인스 학파의 의견에도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인간의 합리성과 동기에 대한 근본적인 전제를 흔드는 이론들이 좀더 ‘현대적’이고 실용적이라고 여겨졌다.
인간의 불완전함이 혁신을 만든다
현실의 경제 사회에 존재하는 등장인물은 복잡하고 단점이 많은, 불완전한 개인과 조직들이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선택의 복잡함과 불확실성은 경제를 명료한 수학 모델로 구성할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그러나 합리성 자체가 제한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모든 사람들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는 비합리적인 사업을 시작하거나, 또는 그런 종류의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진부한 전개 대신 혁신이 자리잡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불확실성을 인정할 때에 비로소 현실이 가져다 줄 수 있는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할 수 있게 되는 것을 경제학이라는 분야에서 또한 깨닫는다.
빈곤과 불평등에 맞서 싸우기
빈곤과 불평등은 인간이 제어할 수 있다
빈곤과 불평등이 개인 간에 존재하는 능력 차이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너무도 많다. 저자의 말에 나는 문득 이런 가치들에 무감각해진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평등은 결코 지진이나 화산 같은 자연 현상과 동등할 수 없다. 저자는 빈곤과 불평등을 야기하는 문제가 인간의 개입을 통해 얼마나 효과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 설명하는 데에 지면을 할애한다. 충분한 노력, 적절한 정책의 채택을 통해 그 불평등의 ‘정도’를 최대한으로 낮출 수 있다는 것이다. 권력과 돈을 가진 사람들은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정책에 개입하고, 시장을 조작할 수 있다. 그런 이들을 대변하는 전문가들의 말에 갖지 못한 사람들도 쉽게 현혹된다. 정책과 그 이면에 있는 진실에 다가갈 시도를 하지 않고, 너무 쉽게 믿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제시한 수치들은 결코 평등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이런 지식들을 발판삼아 무기력, 어떤 이들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빈곤과 불평등에 맞서 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경제가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 자체가 정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경제가 정치라는 걸 이해하면, 경제 현상이 지진이나 해일처럼 불가피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제시하는 내용이 아닐까 싶다. ‘세계화’를 강조하던 학창 시절 교과서 속 내용에 따라 내 무의식 속에서는 “보호주의는 나쁜 것이다”,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을 규제하지 말아야 한다”, “초국적 기업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라는 생각들이 자리잡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한 학파의 의견일 뿐이고 실제 세상에서는 적절한 규제가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씩 이해하게 됐다. 특정 ‘경제학적 주장’이 일부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결과가 많다. 항상 ‘누가 이익을 보는지’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작가는 경제학자이면서도 경제학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다양한 접근법과 그 장단점에 대해 숙지하고, 어떤 정책에 대한 가치 판단은 스스로가 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실제로 ‘참여’할 수 있을까?
저자의 마지막 당부는, 자전거 타기를 배우고, 새로운 언어를 익히고, 새 태블릿의 사용법을 습득하는 것처럼 능동적 경제 시민이 되기를 ‘습득’해 나가라는 것이다.
책을 덮은 후에,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것들의 이면에 숨겨진 이해관계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고, 주류에 대한 비판에는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하지만 당장의 실행 방안에 대해서 저자는 자세한 설명보다는 알쏭달쏭한 역사 얘기들, 그리고 의미심장한 문구들로 대신한다.
지적으로는 비관주의, 의지로는 낙관주의: 여러 수치들과 사례에 기반해 현실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인정하자. 하지만 장기적으로 충분히 많은 수의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위해 싸우면, 불가능한 일도 이루어진다.
이 말이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남았다. 당장 나 혼자서 명확하게 바꿀 수 있는 사회적 단위의 구조는 없다. 하지만 꾸준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많은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더 안정적이고, 평등하고, 지속 가능한 체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모여 사회는 서서히 변화해 왔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 또는 오해하는 이들에 의해 자주 역방향이 되기는 했지만) 어려움에 대해서는 명확히 인식하되, 더 나아지기 위한 노력을 그만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도 어쩌면 ‘올바른 방향을 인식하고’ 동참하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저자가 주장하는 것이 완전히 올바른 방향이라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더 많은 관점을 접하고 스스로 장단점을 파악하는 연습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세상을 보는 자세, 지적으로는 비관적이면서 의지로는 낙관적인(이 말의 자체의 출처는 사실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분이지만) 그 태도만큼은 확실히 닮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