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 글쓰기> 수업의 일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우연히 성공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운 좋은 바보들’이라는 주장이 있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주목받는 논객인 나심 니콜라스가 <행운에 속지 마라>라는 저서에서 한 말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엄연히 이를 뒷받침하는 확률적 근거가 있다. 무한 원숭이 정리(The Infinite Monkey Theorem)에서는, 무한히 많은 원숭이가 무한히 많은 타자기를 치고 있다는 가정으로 사고 실험을 전개한다. 이 원숭이 중 하나가 타자기를 친 결과는 언젠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정리의 내용이다. 물론 현실에서 무한히 많은 원숭이가 존재할 수는 없겠지만, 이로부터 아무리 확률이 낮은 사건이더라도 표본의 숫자가 굉장히 클 때에는 ‘충분히 일어날 수도 있는 일’임을 알 수 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1234’, 또는 ‘1111’ 이라고 쓰인 자동차 번호판을 봤을 때 흥분하며 복권을 사러 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가 되거나, 높은 명예를 얻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비슷한 원리를 적용해볼 수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성공 사례를 분석하며 그 안에 ‘성공의 원칙’이 존재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 과정에는 명확한 인과관계보다는 우연이 더 많이 개입되어 있다. 성공한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이 특별히 뛰어난 두뇌를 가졌다거나 대단한 노력을 해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손가락만 있다면 타자기를 칠 수는 있다. 세상에는 그 정도의 ‘적당히 똑똑한’ 사람들이 꽤 많아 보이고, 그렇게 수많은 표본(타자기를 치는 원숭이들) 중에 운 좋게 성공한 사람들은 항상 몇쯤은 나오기 마련이다. 성공 신화가 대부분의 경우 지나치게 부풀려져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가 이뤄낸 성취를 평가하는 데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성취에 작용한 운의 영향을 간과한 채로 지금까지의 성공이 순전히 자신의 실력에 기반한다고 믿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우호적인 직관 대신 확률 법칙을 통해 자신이 이뤄낸 것들에 대한 운의 영향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의 능력과 판단력을 지나치게 과신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연을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의 경우에 카이스트 지원 당시 구술면접에 나왔던 문제는 확률 계산에 관한 것이었는데, 고등학교에서 모의 면접을 준비하면서 접해본 적이 있는 유형의 문제였다. 수많은 후보 문제들 중 그때의 내가 풀지 못했을 문제가 나올 확률 또한 분명히 있었다. 면접 날짜에 따라서, 그리고 오전과 오후 시간에 따라서 주어지는 문제가 달랐으며, 오전에 면접을 본 친구들이 복기한 문제는 내가 특별히 어려워했던 단원의 문제였다. 내 면접 시간이 만일 오전에 배정되었다면 나는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을까? 카이스트에 다니는 동안에도 가끔 이런 생각이 드는 때가 있었다. 그때에 면접장에 함께 있었던, 그러나 같이 입학하지 못했던 수백 명의 학생들에 비해 나는 그저 운이 조금 더 좋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이 운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은 나의 위치를 온전히 실력으로 얻은 것으로 바라봐주길 원했으며, 이 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가치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무의식에 존재하던 이러한 생각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은 내가 학교를 벗어나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함께 한 학기 동안 연구를 수행하는 활동에 참여했을 때다. 차츰 역할 분담을 하면서 조원들 중 그 분야의 연구 경험이 많은 친구가 실험과 결과 정리를 주도하게 되었는데, 그가 제안하는 방향에서 어떤 비합리성도 찾을 수 없었으므로 겉으로는 군말 없이 따르면서도, 속으로는 끙끙 앓았던 기억이 있다. 카이스트 출신인 내가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는 입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럽게 여겨졌다. 입시 전쟁에서 조금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다는 사실만으로 내가 다른 이들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생각 한켠에 굳게 자리잡아 버린 것이다. 우리가 겪는 선택의 결과에 우연이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은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에도 나는 사람들로부터 나 자신을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으로부터 스스로의 성취와 실력을 동일시하게 되었고, 그에 따른 보상 심리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단연 나 혼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극단을 오간다. 한 순간의 결과가 자신의 탁월함을 입증하기라도 한 것인양 기고만장해지거나, 혹은 원하는 바를 얻지 못했을 때 인생의 패배자가 된 듯 실의에 잠기기도 한다. 카이스트 안에서만 해도 그렇다. 카이스트에서 이공계 학생으로 살아온 것은 운이 좋은 일이었다. 학생들 중 이 말에 적극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카이스트 학생들이 줄곧 안으로는 열등감과 패배감에 시달리며, 바깥으로는 학벌에 대한 우월주의를 버리지 못하고 편협한 시각을 갖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 모두가 결국 운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인식, 확률에 대한 잘못된 직관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생각처럼 단순히 운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갖자고 결심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사고의 기반이 바뀌어야 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속지 말아야 하며 감정을 억눌러야 한다. 당장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모호하고 어려워 보인다. 반면 이미 일어난 사건들의 결과는 명확하다. 이미 결정된 사실이기 때문에 설득할 필요가 없다. 이 얼마나 편리하고 간단한 논거인가.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결과를 기반으로 생각하고 그 결과에 목숨을 거는 것은 인간이라면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행동이다. 하지만 이렇게 가시적인 결과만 가지고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우리의 본성이 교만한 사람들을, 같은 결과를 재현하지 못할까봐 불안함에 시달리는 이들을, 그리고 실패의 책임을 한 개인, 또는 자기 자신에게 몰아세운 탓에 삶 자체에 대해 포기하고 무너지는 패배자들을 양산한다면, 조금이라도 달라질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이러한 세 가지 유형으로 우리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정의해 보고자 한다. 나는 어떤 유형일지, 또는 과거에 자신이 놓인 상황에서 각각 어떤 유형으로 대처했는지 돌아보며 구체적인 개선 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유형 1. 우연을 실력으로 착각한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위험한 착각이다. 운의 개념을 아예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서 항상 피해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보상 심리 때문이다. 어떤 성취에는 필연적으로 일정한 노력과 준비가 필요하다. 원숭이가 타자기를 친다고 해도 그들을 타자기 앞으로 데려올 수 있는 노력과 타자기를 칠 수 있는 손가락이 필요한 것과 같은 논리다. 그러나 결과의 성공 여부는 이런 노력을 과대평가하거나 혹은 과소평가하게 만든다. 어떠한 성취를 위해 내가 이 노력을 기울였고, 여기에 대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주변의 인정을 갈구하고 자신의 자리에 기반한 권위를 내세운다. 그리고 자신의 쥐고 있는 성취에 도달하지 못한 이들은 자신만큼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쉽게 단정지어 버린다. 이들은 망각한 것이다. 바로 함께 타자기를 치고 있던 수많은 원숭이들이 함께 존재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때 ‘꼰대질’의 대표격으로 이슈가 되었던 조선일보 김광일 논설위원의 사설에는 이러한 표현이 있다. “직장도 그렇다. 실력이 있으면 사법시험도 붙고 은행도 들어갔지만 그게 안 되면 벽돌도 나르고 리어카도 끌었다. 분수에 맞게 벌고 살림을 차려 부모님께 손주를 안겨 드려야 되는 줄 알았다. … (중략) … 그러나 우리를 높은 연금에 탐욕스레 집착하는 볼썽사나운 기성세대라고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이러한 논조의 기본 전제는, 자신이 피나는 노력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으니 높은 연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이 위험한 이유는 자신의 성공을 책임 회피의 용도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노력하지 않은’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에는 운이 없으면 기본적인 직장과 결혼을 위한 기반마저 가질 수 없는 사회에 대한 고찰이 들어설 여지가 없다. 또한 같은 글에서 그는 “나는 지금도 너희 세대보다 무거운 것을 들고, 너희보다 오래 뛸 수 있다. 밤샘 일도 너희보다 자신 있다. 너희가 컴퓨터와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잠시 움찔했다만 신입 사원으로 들어온 너희는 불대수를 바탕으로 한 컴퓨터의 작동 원리를 나보다 이해하지 못했고, 상대 눈빛을 제압하며 계약을 따내는 실전 영어도 우리가 월등 나았다.” 라며 갓 들어온 신입 사원과 자신의 업무 능력을 굳이 비교해가며 자신의 실력을 과신하고, 이를 통해 현재의 자리까지 올라왔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이러한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무모한 낙관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이런 낙관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면 자신의 방식에 어떤 결함이 있다고 해도 자신이 줄곧 이 방식으로 성공을 이루어왔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스스로가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지금껏 그저 운이 좋았을 뿐임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유형 2. 운이 개입한 실패에 지나치게 휘둘린다
결과에 의한 기억의 왜곡은 운이 좋았던 사람에게도 일어나지만 반대로 운에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일어난다. 자신이 들인 노력이 유효했음에도 불구하고, 확률의 벽에 가로막혀 일어난 실패에 정신적으로 쉽게 무너지고 스스로를 책망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행동과 자신의 성격까지도 하나하나 따져보면서 잘못된 점을 찾으려 하고, 이러한 결점을 모두 고쳐야 실패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결정론적 완벽주의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나는 이 유형에 더 가까운 것 같다. 카이스트에 입학하고 나서 나는 대부분의 (천재가 아닌) 학생들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학업 수준을 갖고 있음을 실감했다. 하지만 면접 때의 운이 뒤엎어져 내가 이 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면, 그 당시의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내 공부 방식에서 끊임없이 잘못된 점을 찾고 스스로의 실력에 크게 의심을 가지게 되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겨우 종이 한 장 차이인 결과에 따라 성공 수기가 그대로 실패 수기가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늦게나마 운에 대해 사색할 기회를 갖게 된 지금, 대학 입시 시절의 나는 로또에 인생을 거는 사람처럼 무모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했을 때의 대안을 생각하는 것조차 의식적으로 거부했으니 말이다. 임진왜란의 흑역사로 남은 신립 장군의 ‘배수의 진’과 같은 오류를 저지른 것이다. 이제 대학원에 입학하며 그 당시의 결과를 충분히 뒤집을 정도로 꾸준하게 노력하고 성장해 같은 자리에 서게 된 친구들을 마주한다. 한 번의 면접으로 불합이 결정되는 입시보다 운의 영향이 조금 덜 작용하는 성취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길이 존재했다. 한 가지 결과만을 맹목적으로 바라며 행운을 기도했던 이들이라면 쉽게 일어서서 나아가기 쉽지 않았을 길이다. 가능한 대안들을 미리 생각하거나 불리한 결과들에 대처하는 법에 익숙하지 못한 이런 이들 또한, 운이 작용하는 방식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실패와 쉽게 화해하지 못한다. 비록 머릿속으로는 우연적인 사건의 관여로 실패에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이 나의 일이 되었을 때 감정을 제하고 냉정하게 확률 계산에 몰두하기는 쉽지 않다. 어찌됐든 당장 대학에 가는 것보다 사소한 실패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 강인한 사고와 정신적 체력을 가다듬는 것이 어린 시절의 우리에게 더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유형 3. 행운의 간택을 받지 못할까봐 항상 불안하다
운이 현재의 결과에 미치는 영향을 쉽게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삶에 존재하는 불확실성의 영역을 잘못 판단한다면 그 부작용인 가면 증후군(Imposter Syndrome)에 빠질 수도 있다. 가면 증후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까지의 자신의 성취가 그저 운이 좋아서 이루어진 것 뿐, 자신의 실력은 보잘것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앞으로의 과정에서 자신의 무능이 드러날까봐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심리학자 로즈 클랜스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수행한 실험에서는 높은 성적을 받은 학생 일부가 자신은 그만큼의 성적을 받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심지어 이 대학에 입학할 수준도 되지 못하는데 입학 과정에서 오류가 생겨 자신이 대학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혹자는 자신이 이뤄낸 성취를 행운의 공으로 돌리는 것 자체가 오히려 이러한 증후군의 원인이 되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성적으로 운의 영향을 분석하는 것과 막연한 불안감에 빠지는 것은 다르다. 가면 증후군의 근본적인 원인은 다원적 무지, 즉 자신만이 불안감을 느낄 것이라는 비확률론적인 믿음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른 잣대를 적용하고, 자신에 대해서는 최대한 비관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주변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모순적이게도 자신과 같은 불안감을 느끼지 않고, 어떤 일이든 유능하게 해결해 나갈 수 있다는 낙관주의적 잣대를 적용하는 것이다. 직장인의 75%가 가면 증후군을 겪고 있다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대부분의 경우, 내가 운이 좋았다면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들 또한 운이 좋았을 확률이 더 높고, 이들 사이에서 자신의 진짜 실력을 들킬까 봐 노심초사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가면 증후군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자’, ‘자기 자신의 성취에 가치를 두자’는 틀에 박힌 조언은 현실감이 없다. 이러한 조언을 기반으로 오히려 섣부르게 새로운 일에 뛰어들어 실패를 맛보면 유형 2의 좌절감을 맛보게 될 수도 있다. 대신, 결과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고 확률이 삶에 작용하는 방식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분명히 넘어설 수 있는 사고의 오류다.
통제의 환상
알면서도 속는 것이 인간이다. 동전의 앞면이나 뒷면이 나올 확률은 이전의 결과와 관계없이 2분의 1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막상 룰렛 앞에서 빨간색이 20번 연속으로 나오면 검은색에 돈을 걸게 되는 것이다. 구름에서 사람의 얼굴을 보고, 보름달 속에서 토끼를 찾아내듯 무작위적인 것에서 일정한 패턴을 읽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는 이 현상을 심리학자들은 통제의 환상(Illusion of Control)이라고 부른다. 재미있는 예시가 미국 도시에 있는 횡단보도의 신호등 버튼이다. 이 버튼은 사실 작동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누르나 말거나 녹색불이 켜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시간은 그대로다. 하지만 버튼을 누름으로써 사람들은 자신이 이 상황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고 생각하고, 신호등이 바뀔 때까지 더 인내심 있게 버틸 수 있다고 한다. 일종의 행동에 대한 플라시보 효과인 셈이다. 이렇게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생각, 또는 다른 이들은 자신과 다르게 그들의 삶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다는 환상은 매순간 우리의 시야를 흐린다. 앞의 세 유형에 자신이 해당되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내가 지금껏 나의 어떤 자질 때문에 성공, 또는 실패했다는 인과관계를 만들어 교만함 또는 패배감에 젖게 되고, 그 사람은 특별히 어떤 이유 때문에 나와는 달리 유능하다는 생각에 불안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착각에서부터 사람들이 심리적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패턴과 의미를 통해 인과관계를 설정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진화적 산물이고 본성이기 때문에 결코 이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만 같다. 적어도 우리가 무엇에 속는지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첫번째 단계일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단계로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무모한 선택에 대해 경계하는 삶의 태도를 연마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조언으로 보인다. 인간의 심리적 결함을 완전하게 치료할 수 있다고 믿는 것만큼 허황된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자신의 머리카락이 자라는 속도나 심장 박동의 주기를 조절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보다 조금 더 실용적인, 우리의 일상에 적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이 분명 존재한다. 핵심은 운이 적용되는 이들, 즉 확률의 표본이 되는 대상들을 바라보는 시야의 확장이다. 즉, 자신과 함께 타자기 앞에 놓인 무수한 원숭이들의 존재를 끊임없이 인식할 수 있는 환경에 자기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알면서도 속지 않는 방법: 실용적인 실천 방안들
자신이 속한 집단의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 먼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점점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자신과 비슷한 분야의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교류하게 된다. 그들은 우리 자신과 거의 비슷한 선택을 하고, 비슷한 수준의 결과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주변 사람들의 성취와 자신의 성취를 정량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히기 굉장히 쉽다. 개인주의와 성과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대조적으로, 내가 우연히 다른 선택을 했을 때, 내게 다른 운이 작용했을 때 어떤 결과와 대안이 있었을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완전히 다른 분야에서, 다른 학문을, 또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온 사람들, 그들의 삶을 관찰하면서 비로소 우리가 불확실성과 함께 싸우는 존재임을 인식할 수 있다.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나의 운이 어떤 이에게는 비껴갈 수 있었음을 인식하고 다양한 길을 모색하는 동기를 얻는 것이다. 주사위를 한 번 던지면 6이 나오는 사람도 있고 1이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100번, 그리고 200번, 수많은 시행을 반복하면 각자가 지금까지 관찰한 주사위 눈의 합은 거의 비슷해진다. 우리 일생에서는 수많은 사건이 일어나므로, 결국에는 비슷한 수의 행운과 비슷한 수의 불운이 닥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타인의 삶은 내가 예상하지 못한 주사위 눈이 나왔을 때 참고할 수 있는 훌륭한 본보기이고, 자신의 삶에서 운이 미치고 있는 영향을 지속적으로 환기할 수 있는 표본이다. 자신의 성취에 갇히지 않기 위해, 잊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삶과 멀리 떨어진 이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소통하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물리적으로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섞이는 것이 현실적으로 힘든 경우에는 자신에게 낯선 공간과 시대를 담은 문학과 영화에 자주 노출되는 것도 방법이다. 나의 경우에는 <소공녀>, <플로리다 프로젝트>와 같은 영화에서 운이 비껴간 사람들을 어떻게 포용할 수 있을지와 대안적인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이러한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정제된 언어와 영상 속에서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유형을 제 3자의 관점으로 인식하고,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던 확률의 표본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우리는 비로소 수많은 우연들과 개개인의 합리적인 시행착오가 아름답게 뒤섞인, 불확실성의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