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민 교수님의 새 에세이를 읽었다. 이번 책의 주제는 다름아닌 ⌜논어⌟다. 제목을 흘끗 보았을 때에는 별로 상상하지 못했던 내용물이다.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답이 논어에 나와 있다는 뜻일까? 하지만 교수님은 여기서 희망, 보다는 간신히, 라는 수사어에 조금 더 힘을 싣고 싶으셨던 것 같다. 고전에 담긴 살아 숨쉬는 지혜 같은 건 없다고 처음부터 선언하며, 그럼에도 우리가 이런 고전들을 붙잡고 독해하며 겨우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말한다.
삶과 세계는 텍스트이다
인문학 연구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책에서 드문드문 언급하는 최근의 고전 연구는 빅데이터 기술 발달의 성과로 양적 데이터의 분석으로 그 흐름이 옮겨가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텍스트’ 자체에 집중하여 한 개인의 정교한 시선과 통찰로 고전의 진짜 의미를 파악하자는 주장은 구시대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하여 학생은 호소한다. 이렇게까지 힘든 일인가요,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이? 아무리 되풀이해서 읽어도 별생각이 안 나요! 이 텍스트 안에 뭔가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있긴 있겠죠, 하지만 제 눈에는 그 메시지가 보이지 않아요 - 난감해진 선생은 이렇게 학생을 달래보는 거다 - 우리는 양적 자료를 분석하는 이들과는 다르네. 우리의 방법론은 ‘정신집중’이지.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거야. 자, 정신집중. - 이때 상당수의 학생들이 문득 구식 학문의 어둡고 축축한 폐허에 혼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주섬주섬 짐을 싸서…
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많은 데이터와 통계적 도구의 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 개인(이 책을 읽을 독자?)의 예민함과 감수성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이 책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끈질기게 설득하며 우리를 붙잡는 것이다.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이 텍스트 속에 있다고.
우리는 명확한 설명에 목말라 있다. 논어가 주는 메시지란 무엇인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게 서둘러 ‘궁극의 메시지’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 하다 보면 우리는 텍스트 사이에 숨겨진 정말 아름다운 것들을 놓치게 된다.
텍스트의 간극에 놓여 있는 요소 중 저자가 처음으로 강조하는 것은 ‘침묵’이다. 공자는 논어에서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특정 사안에 대해’ 침묵하고자 함을 표명한다. 그러한 침묵은 어떤 선언보다도 오랜 시간 동안 살아남아 자신을 알아봐줄 예민한 독자를 기다린다. 그리고 조용하게 기존 체제를 전복하는 힘을 갖고도 있다.
나무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 세상에 널린 끔찍한 짓에 대한 침묵이므로 거의 죄악이라면 / 그 시대는 어떠한 시대인가.
불완전한 한 인간, 공자
공자는 실패한 사상가다. 적어도 그 시대의 컨텍스트에서 보면. 그가 꿈꾸던 이상 세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논어에 남겨진 공자의 일화는 예수나 다른 종교의 신화에 비하면 너무도 초라할 만큼 인간적이다.
공자 역시 나병에 걸린 환자에게 손을 대기는 댄다. 그러나 “깨끗하게 되어라” 라고 말하는 대신에, 공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이런 사람이 이런 병에 걸리다니!”
그러나 공자가 실패를 이미 예감하고 있었음에도 끝내 ‘위대한 것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을 버리지 않은 채 분투했다는 것에서 우리는 공자라는 과거의 한 사람에게 끌리게 되는 것 같다. 마치 그때에 공자 곁에 모여들었던 제자들처럼 말이다. <매료된 이들은 텍스트를 남기고, 남겨진 텍스트는 상대를 불멸케 한다.>
메타 시선
아는 것, 모르는 것, 그리고 모르는 것을 아는 것. 책을 읽으면서 지금의 나에게 가장 유용하다고 생각했던 가르침이 ‘메타 시선’에 대한 개념이다. 모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모르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무지를 파헤칠 수 있는 정교한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공자가 극기복례라고 했을 때, 거기에는 극복 대상이 된 3인칭의 자아뿐 아니라, 대상화된 자신을 바라보는 1인칭의 자아가 동시에 있다. 메타 시선을 장착한 사람은 대개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서는 발언을 삼가는 사람, 자신이 알 수 없는 큰 영역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태도를 공자 시대의 예식과 숭배의 자세와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당시에는 얼마나 혁신적인 생각이었을지 조금 더 와닿는 것 같다. 단순히 신의 뜻을 ‘알기’ 위한 신앙적인 믿음에 자신의 판단을 위임하기보다는, 인간 세계의 합당함과 더 나아가 스스로의 생각을 주체적으로 반추하고 검증하는 또 다른 시선을 공자는 지(智)라고 정의했던 것이다.
정확하게 사랑하고, 정확하게 미워한다는 것
다시 돌아가서, 수많은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리 새롭지도 않을지 모를 ⌜논어⌟를 구태여 우리가 다시 독해해야 한다는 데에 마침내 완전히 동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봤다. 어쩌면 지금의 시대 또한 당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주나라처럼, 기존의 사회를 이루던 기본적인 가치들과 구조 체계가 전복되는 혼란에 들어섰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사람들이 옳다고 생각하며 견고히 쌓아놓았던 가치에 금이 간 지는 오래고, 모순과 너무도 명확해 보이는 불합리에 분노한 사람들은 과거의 가치를 폐기하고자 결론내리기도 한다. 한국 사회에서 그런 과거의 가치는 ‘유교’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려져 어떤 의미에선 혐오의 대상이 된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느슨한 정의에 실수로 포함되어 누명을 쓴 텍스트들을 꺼내어 닦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이다.
삶에 대한 섬세하고 정교한 시선을 바탕으로, 어떤 대상을 정확하게 사랑하고 또 기만과 편견 없이 누군가를 정확하게 미워하며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어떤 명확한 정답도 제시해주지 않는 것 같은 삶에서 간신히 안고 갈 수 있는 하나의 등불이 아닐까. 그런 생각으로 마침내 책을 덮는다.
성급한 혐오와 애호 양자로부터 거리를 둔 어떤 지점에 설 때야 비로소 자신이 다루고자 하는 대상의 핵심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 논어 에세이가 서 있고 싶은 지점도 그런 지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