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적 글쓰기> 수업의 일환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곧 다가올 내년에는 디즈니 실사 영화 <인어공주>가 제작된다. 어렸을 적 원작 <인어공주> 애니메이션을 기억한다면, 그리고 지금껏 디즈니의 실사 영화 시도가 가져다 준 긍정적인 반응을 생각한다면, 바닷속 깊은 곳에 숨겨진 아름다운 궁전과 풍경들을 현실감 있는 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올해 여름, <인어공주>의 주인공 '에리얼' 역에 캐스팅된 배우를 공개하자마자 이 영화에 대한 논란이 번지기 시작했다. 에리얼로 낙점된 '할리 베일리' 라는 가수 겸 배우가 흑인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됐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인어공주는 하얀 피부와 붉은 머리를 가진 미인이라는 설정이 일반적이다. 원작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착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결과다. '싱크로율'이라는 말이 존재하듯, 원작을 각색한 작품들은 원작을 얼마나 잘 재현했는지에 대한 기대감이 동반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피부색이 바뀐 인어공주를 낯설게 여기고, 원작을 충실히 재현한 캐스팅이 아니라고 실망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거부감은 어디서 오는가

하지만 그런 ‘거부감’을 표출하기 이전에 앞서 스스로가 느끼는 불편한 감정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어공주의 캐릭터가 하얀 피부와 붉은 머리색으로 대표되기 이전에, 마녀가 탐낼 만큼 아름다운 목소리와 순진하지만 용감한 성격으로 먼저 묘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생각일까? 오히려 이런 특성이 <인어공주> 서사를 이끌어나가는 주요한 동력인데 말이다. 새로운 에리얼이 될 할리 베일리는 유튜브에서 비욘세의 노래를 부른 영상을 올리고 실력을 인정받아 가수 생활을 시작한 19세의 소녀다. 캐스팅에 반발하여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 또한 음악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그러므로 에리얼의 겉모습이 달라짐으로써 원작의 가치가 훼손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가진 '다름'의 기준이 피부색과 외모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물론 시각적인 정보에 가장 민감한 것이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이고, 외적인 모습과 전형적인 미의 기준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다. 이를 어쩔 수 없는, 개인의 힘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사회 문제로 치부하기보다는, 이번 캐스팅 사건을 우리가 자각하지 못했던 무의식 속의 편견을 반영하는 거울로 삼아보는 것은 어떨까. 인어공주의 다른 내적인 특성보다 피부색과 외모를 우선하는 사고, 그리고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로의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두려움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더 합리적인 가치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스스로가 이러한 변화의 흐름에 공감하거나 동의하는지 먼저 판단한 후에 캐스팅의 적합을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나는 차별주의자는 아니지만 인어공주가 흑인인 건 좀…" 이라고 말하는 대신 말이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흑인 공주를 만들고 싶었다면 이미 있는 인어공주를 건드리는 대신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냐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생각이 이미 갖고 있는 권력을 내주고 싶지 않은 기득권의 심리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인어공주> 이야기는 지금까지 수많은 세대의 사람들이 어린 시절 향유했던 고전이다. 만일 디즈니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동화가 아무리 높은 문학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해도, 현재의 <인어공주>와 같이 자리잡기까지는 여러 세대에 걸쳐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디즈니의 실사 영화는 새롭게 동화를 접하는 어린이들 외에도, 고전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어른들을 위한 영화라고 볼 수 있다. <인어공주> 또한 전 세계의 많은 이들의 유년 시절 상상 속의 한 켠을 차지했던 의미 있는 작품이고, 그래서 이 이야기의 실사화가 지금껏 주류로 인정받지 못했던 흑인을 주인공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이라고 생각했던 '기준'을 다시 쓰는 작업이다. 반감이 드는 것은 기존에 견고하게 자리잡은 이미지가 변화된다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에서 기인하며, 여전히 무의식 속에 내재된 편견이 작동한 결과다.

물론, 인어공주 이야기에서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 즉 북유럽에서 흑인이 등장하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인어의 피부색이 흰색으로 표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사에 반한다고 할 수는 없다. 애초에 그들은 상상 속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화일 뿐이고, 판타지적 요소가 주된 소재로 존재하는 이 작품에서 역사에 대한 명확한 고증이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반감의 주된 원인은 교묘하게 숨기고 그럴듯한 논리로 설명하려는 이러한 현상 또한 아직 다양성을 온전히 수용하지 못한 사회를 반영한다.

냉소주의가 답은 아니다

이러한 현상에 비추어 볼 때, 최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 자체가 점점 더 강화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시선을 장착한 관점에서는 이번 흑인 인어공주의 캐스팅을 디즈니의 지나치고 과시적인 PC주의가 낳은 부작용으로 보기도 한다. 사람들마다 성격과 가치관이 제각기 다른 것처럼 취약계층에 대한 인권 감수성도 다를 수밖에 없다. 어떤 종류이든 소수자 그룹에 속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차별에 대한 문제를 스스로에 관한 문제로 인식하기 때문에 더욱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현재의 갈등 상황이 비롯된 데에는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마저 똑같은 속도로 다양성의 기준을 강요했던 탓이 크다. 이들을 포용하는 것을 실패한 채로 진행된 변화가 낳은 부작용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라고 본다. <인어공주> 캐스팅에 대한 비뚤어진 비난은 이러한 냉소주의의 희생양이다. 변화에서 소외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에 결국 변화와 관계된 모든 시도에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긍정적인 시도일지라도 말이다. 이러한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것이 너무도 쉬운 사회고, 자신이 애초에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번 캐스팅 사건을 계기로 피부색이 달라진 인어공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돌아봄으로써, 그리고 왜 그러한 관점을 가지게 되었는지 사유함으로써 성찰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스스로가 가진 차별적 시선을 명확히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다름'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번 캐스팅 논란은 디즈니와 우리들 자신에게 각자의 숙제를 남겼다. 디즈니는 새로운 실사 영화의 완성도와 작품성으로써 이것이 의미 있는 움직임이였음을 증명해야 할 것이고, 우리는 ‘흑인 인어공주’를 지나치게 의식하고 영화를 보기보다는 영화가 펼쳐놓을 서사와 즐길거리들을 있는 그대로 향유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지금껏 주류의 눈으로만 읽혔던 고전에 다양성을 녹이고자 하는 시도는 이제 막 씨앗을 틔웠다. 그 의미에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다면 더 이상 인어공주의 피부색이 이상하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더 나아가, 원작의 상상력으로 표현되는 세계가 가진 아름다움을 보존하면서도 현대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인어공주의 주체성을 드러내기 위해, 디즈니가 어떤 답을 제시할지 기대가 된다. 공격적이고 직접적인 외침에 본능적인 적대감을 갖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그들을 설득하고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이 예술이다. 설령 그 시도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더라도, 비난하며 과거로의 회귀를 종용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격려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이런 작품이 논란이 되지 않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